예산 40만원으로 100명 회사 행사를 기획해봤다 — 그리고 몰랐던 재능을 하나 발견했다
얼마 전 회사에서 ‘해피아워’라는 걸 기획하라는 미션을 받았다.
조건은 이랬다. 예산 40만원, 대상은 서울 사무소 본부 인원 100명. 직원들이 간식을 먹으며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만들라는 거였다.
솔직히 처음엔 숫자부터 계산했다. 100명, 40만원. 1인당 4천원 꼴. 이 돈으로 뭘 어떻게 채우나 싶었다.
부담보다 설렘이 먼저 왔다
돌아보면 나는 늘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친구 생일이면 파티룸을 예약해서 컨셉에 맞춰 꾸미고, 브라이덜 샤워도 몇 번 준비해봤고, 그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까지 늘 내 몫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해온 일들이다.
그래서 이번 미션도 일이 아니라, 판이 깔린 기회처럼 느껴졌다. 회사 예산으로, 회사 공간에서, 마음껏 기획력을 발휘해볼 수 있는 기회.
디테일이 ‘이벤트’와 ‘모임’을 가른다
시기가 마침 월드컵 시즌이라 컨셉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Be the Reds’ — 오늘 하루만큼은 다 같이 빨갛게 하나가 되자는 의미였다. 그냥 응원 분위기만 내는 게 아니라 입장 조건까지 걸었다. 빨간색 소지품을 하나라도 지참해야 들어올 수 있게 하고, 팀원들과 입구에서 직접 체크했다.
나는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었고, 함께한 팀원들은 머리띠, 축구공 안경, 응원 막대까지 갖췄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디테일이 ‘이벤트’와 ‘그냥 모임’을 가르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일과 취미가 만나는 순간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역시 예산이었다.
100명분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려면 효율이 생명이었다. 코스트코로 가서 피자, 샌드위치, 닭꼬치, 츄러스, 파인애플, 방울토마토, 팝콘, 나초를 대량으로 담아왔고, 음료는 무알콜맥주와 제로콜라, 이온음료로 채웠다.
여기서 도움이 된 건 다름 아닌 내 본업이었다. 나는 8년 차 포장재 구매 담당자다. 정해진 예산 안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는 일을 매일 한다. 그 감각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했다. 일과 취미가 이렇게 만나는 경험은 흔치 않다.
예산 부족은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이번 기획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순간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이거다.
승부 예측 이벤트를 준비했다. ‘대한민국 vs 남아프리카공화국’ 경기 결과를 맞혀서, 예측한 팀 박스에 명함을 넣는 참여형 게임이었다. 컨셉을 제대로 살리려면 박스를 축구 골대 모양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여기 쓸 예산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 남아 있던 지함박스를 가져다가 직접 만들었다. 포장재 구매팀이라 이런 자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종이로 골대 프레임을 만들고, 바닥엔 잔디를 프린트해 붙이고, 박스 겉면엔 국기를 붙였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컨셉에 완벽히 맞는 소품 하나가 완성됐다.
돌이켜보면 이 과정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걸 알려줬다. 예산이 부족한 건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제약 안에서 머리 쓰는 걸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
당일엔 직원들이 입장할 때 ‘오 필승 코리아’를 틀어놓았다. 회의실엔 만국기를 걸고 축구공 모양 조명까지 세팅했고, 후반전 경기는 다 같이 스크린으로 봤다.
작은 한 줄이 완성도를 좌우한다
경기가 끝난 뒤엔 럭키드로우를 진행했다. 승부 예측이 맞은 직원 중 추첨으로 ‘행운의 주인공’을 뽑아 독거미 키보드를 선물했다. 사실 이 경품에 예산 대부분을 썼다. 예측이 빗나간 직원들에게도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 스트레스볼을 선물했다.
“예측은 빗나갔지만, 행운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한 줄이 아쉬움을 웃음으로 바꿔줬다. 사소한 카피 한 줄도 이벤트의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걸 다시 느낀 순간이었다.
이건 재능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직원들이 “덕분에 잘 쉬었다”, “재밌었다”고 말해줬을 때, 그 한마디가 40만원짜리 미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상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는 후기를 남기려는 게 아니다.
이번 일을 준비하면서 나는 확신에 가까운 걸 느꼈다. 컨셉을 잡고, 제약 안에서 방법을 찾고, 사람들이 즐거워할 디테일을 고민하고, 그 결과로 누군가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물하는 일. 이게 나에게는 일이 아니라 재능에 가깝다는 걸 이번에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요즘 ‘파티플래너’라는 방향을 진지하게 그려보고 있다.
지금 당장 회사를 나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회사가 뒤숭숭한 요즘,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서 살아있다고 느끼는지를 정확히 알아두고 싶었다. 이 해피아워가 그 답의 한 조각이었다.
작게는 이런 회사 이벤트부터, 언젠가는 내 이름을 걸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나 더 정확히 알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