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이슈로 공급업체가 단가 올려달라고 했을 때, 8년차 구매담당자가 한 일

중동 이슈 단가 인상 대응은 요즘 구매담당자라면 피하기 어려운 숙제다.

러-우 전쟁 때도 한 차례 홍역을 치렀는데, 호르무즈 해협 긴장이 고조되면서 또 한 번 크게 왔다.

솔직히 연간 두세 번은 생기는 일이지만, 이번엔 규모와 타이밍이 달랐다.

그런데 이번 건 좀 달랐다. 단순히 “원자재 올랐으니 단가 올려주세요” 수준이 아니라, 업체 쪽에서 아예 자료까지 들고 왔다.

해운 운임 지표, 원재료 시세 추이, 심지어 사내 원가 구조까지.

준비해온 공문을 보는 순간, ‘이건 그냥 거절할 수 있는 케이스가 아니구나’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엔 깎지 않았다. 업체가 요청한 금액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 단가보다 수급이 끊기는 게 훨씬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PET 용기 단가가 오르는 이유

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원료의 핵심은 파라자일렌(PX)과 에틸렌글리콜(EG)이다. 둘 다 석유 기반 원료인데, 중동산 원유·화학품 물동량이 호르무즈 해협에 집중돼 있다.

해협 긴장이 고조되면 두 가지 경로로 단가에 영향이 온다.

첫째, 원유 가격 자체가 오른다. 원료값이 오르면 PET 수지(레진) 가격이 따라 올라간다. 둘째, 해상 운임이 폭등한다. 홍해 우회 항로로 선박이 몰리면서 컨테이너 운임(SCFI 기준)이 한때 평시 대비 세 배 이상 치솟았다. 수입 원재료 비중이 높은 포장재 업체들은 이 운임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우리 거래 업체도 이 두 가지를 다 근거로 들고 왔다. 반박하기 어려운 데이터였다.


단가 인상 공문을 받고 내가 한 첫 번째 행동

무조건 “검토하겠습니다”라고 받아두고 일주일을 그냥 흘려보내는 건 최악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묵묵부답이 암묵적 동의로 해석되기도 하고, 내부 보고가 늦어지면 결국 사후 처리만 더 복잡해진다.

나는 공문을 받은 당일, 세 가지를 먼저 챙겼다.

① 업체가 제시한 근거 자료 검토 업체 자료만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해운 운임 동향, 원재료 가격 흐름을 별도로 확인해서 업체가 들고 온 수치와 대조했다. 방향은 맞았다. 실제로 이 시기에 포장재 원료 업체들도 동시에 단가 인상을 요청하고 있었고, 우리 거래 업체 역시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근거 있는 인상 요청’이라는 판단이 섰다.

② 현재 계약 조건 재확인 SAP에서 현재 발주 단가, 계약 기간, 물량 약정 내용을 뽑았다. 기존 계약에 단가 변동 관련 조항이 없다는 걸 이때 다시 확인했다 — 이게 나중에 조건 협상의 근거가 된다.

③ 내부 원가 영향 시뮬레이션 업체가 요청한 인상폭을 그대로 수용하면 우리 제품 원가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먼저 계산했다. 이걸 미리 해두지 않으면, 윗선 보고할 때 “얼마나 중요한 이슈인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금액이 크든 작든, 구매담당자가 숫자를 들고 올라가야 결재가 빠르다.


이번엔 깎지 않았다 — 수급이 단가보다 중요할 때

내부 검토 결과, 이번엔 요청 금액을 전액 수용하기로 했다.

구매담당자 입장에서 단가 협상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협상에도 때가 있다. 이번처럼 공급망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단가를 억지로 눌러버리면, 업체 입장에서는 납기를 조정하거나 물량을 조이는 방식으로 우회한다. 말은 안 해도 그렇게 된다.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리 거래 업체들도 자기네 원료 업체로부터 단가 인상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대금을 못 맞춰주면 그쪽 현금흐름이 먼저 흔들리고, 그게 수급 차질로 이어질 수 있었다. PET 용기는 우리 제품 라인에서 대체 납기가 짧지 않다. 공급이 한 번 끊기면 단가 몇 퍼센트 아끼는 게 의미 없어진다.

판단은 단순했다. 지금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맞다. 단가 인상 수용이 패배가 아니라, 수급 안정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걸 내부 보고에도 그대로 담았다.


협상 후 SAP 처리와 내부 공유

합의 후엔 SAP에 변경 단가를 반영하고, 변경 이력을 남겼다. 우리 회사는 전략구매(서울 본사)와 조달구매(공장)가 나뉘어 있어서, 단가 변경 확정 후 공장 쪽 발주 담당자에게도 변경 내용을 공유하는 게 필수다. 이 부분을 빠뜨리면 공장에서 이전 단가로 발주가 나가는 사고가 생긴다 — 실제로 이런 경우를 한 번 봤다.


결국 중요한 건 수용/거절이 아니라 “왜”를 설명할 수 있느냐다

공급업체가 단가 인상 요청을 공문과 자료까지 들고 올 정도면, 단순히 거절로 넘기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주는 것도 담당자가 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수용이든 거절이든 그 판단의 근거를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업체 자료를 그대로 들고 올라가는 것과, 교차 검증 + 원가 영향 시뮬레이션 + “지금은 수급 안정이 우선이라 전액 수용이 맞다”는 판단까지 패키지로 올리는 것. 결론이 같은 ‘수용’이어도 담당자로서의 무게가 다르다.

중동 이슈가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른다. 러-우 전쟁 이후로 이런 외부 변수가 단가에 직접 튀어오르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결국 업체와 쌓아온 신뢰가 버팀목이 된다. 이번 수용이 그 신뢰를 다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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